1999년 5월, 나는 부처님 오신 날을 전후하여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조계사 건너편 공평 아트세터를 시작으로 서울, 부산, 광주 등 지방 순회 전을 갖게 된 것이다.
무리한 경비를 투자해가며 순회 전을 계획한 것은 '불교미술 현대화, 불교디자인 개척화'라는 화두를 안고 그동안 고심해온 흔적들과 독존獨存에 대한 검증된 에너지가 필요해서였다.
그때 스님께서 큰 힘을 보태주셨다. 몇 번을 망설이다. 작품집 서문을 부탁드렸더니 '내가 살다 보니 미술에 대해 뭘 안다고 화가 작품 집에..... 그러나 우천에게는 마음의 빚이 있어 잔소리 한 마디 안 할 수 없구나'하시며 이렇게 써주셨다.
".....불교 미술은 시대에 뒤떨어진 구태의연한 복제품으로 알고 있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그런데 여기에 도전이라도 하듯 그는 달력, 그림, 일러스트, 포스터, 탱화, 벽화, 단청, 심지어 스티커 한 장에 이르기까지 불교 회화 전반에 걸쳐 현대적 감각의' 디자인과 미술'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이 땅에서 처음으로 외롭게 개척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 속에는 흔히 바람, 안개. 물방울, 대 숲, 그림자 등이 나오고 다가와 죽비와 섬돌 위에 놓인 신발과 처마 끝의 풍경들 밝고 고요한 산사 승방의 분위기가 짙게 배어 있다. 이와 같은 고요와 침묵의 세계는 곧 그 자신이 기대고 있는 청정한 정신 공간이기도 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밝히고 싶은 일이 하나 있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일에 처음 마음을 냈을 때 선뜻 떠오른 사람이 고현 교수였다. 그의 그림으로 로고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지금의 연꽃 스티커는 까다로운 몇 차례의 눈길을 거쳐 이루어 놓은 그의 솜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문학을 하는 주변의 선후배들이 몹시 부러워하며 스님과의 관계가 그 정도였던가, 다시 보는 시선들마저 있었다.
나는 그때 내 전람회의 제목을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이라는 쉽지 않은 불교용어를 썼다. 그리고 그 제목을 풀어서 이렇게 정리했다. '차안의 세계도 피안의 세계도 모두 맑은 심안心眼으로 보면 둘이 아니고 하나로 통하는 불이문不二門이다. 마음의 눈으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하면, 열반의 저 언덕이나 사바의 이쪽이나 모두가 하나다
20대 후반 어느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손바닥 발바닥 사건'이후 그리고 불일암에서 스님에게 배운 거꾸로 보기를 통해 내 화로畵路와 화풍畵風은 결정되어버렸다. 목적 미술이건, 순수 미술이건 오로지 불교 미술과 관계된 일이라면 금생의 업으로 알고 습을 굴려왔다.
소재素材의 미술이건 주제主題의 미술이건, 회화건 디자인이건 공예건 조형물이건 형식과 장르에는 관심도 의미도 두지 않았다. 다만 작가의 영혼과 비원悲願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었는가만 중요할 따름이었다.
일찍이 읽었던 <어린왕자>는, 사막을 아름답게 보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이미 물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을 불교 식으로 표현한다면, '모든 씨앗은 마음속에 있다'가 된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할 뿐이다.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내 작품의 이미지는 내 마음일 것이고 내가 체험한 불교의 모습일 것이다.
화엄 세계에 난화골難畵骨, '호랑이를 그릴 때 가죽은 그릴 수 있어도 뼈까지 그리기는 어렵다'에서 유래된 용어다. 보는 대로 표현한 것과 아는 대로 표현한 것의 차이점을 뜻한다. 겉으로 보이는 대상이야 누구나 표현할 수 있지만 작품 속에 감추어진 실상實像이 표현되려면, 더구나 종교 화 작업에 있어 그만큼 축적된 기도와 수행이 받쳐주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스님은 빨래판 충격 때문에 평생을 문자 포교와 무소유의 삶을 살다 가셨다. 스님은 내가 화엄의 세계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浮游했던 젊은 시절, 나를 지켜봐 주셨고 방향을 잡아 주셨다. 그래서 나 또한 '시각 포교와 맑고 향기롭게 머슴'으로 사는 삶을 목표했다. 어느 훗날 이 모두를 뛰어넘을 수 있는 화엄장 세계의 시절 인연을 만날 수 있을 때까지, 그 화두를 안고 철저히 묻혀 볼 따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