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도시 부산에서 두 번째 맑고 향기롭게 행사를 하던 날이다. 식당으로 초대되어 스님을 중심을 행사 관계자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때 아직 먹거리가 나오기도 전에 식당의 사장이라는 한 보살이 지필 묵과 화선지를 들고 나타났다.
활짝 핀 얼굴로 스님께 큰절을 올리는가 했더니 다짜고짜 화선지를 펼치며 그림이나 글씨를 부탁했다. 이 집을 소개한 부산 본부장도 황당한 표정이었고, 우리 또한 '이 무슨 경우에 없는 짓이냐'고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부산 박 수관 본부장은 전국 본부장 중에서도 개인 시주를 가장 많이 하여 장학금, 노인 복지, 급식 밥차, 공원 정화 활동 등으로 해마다 연말 결산 때 큰 박수를 받았던 '부산 시민 대상'의 수상자였다. 그 또한 주인의 돌발 행동에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보소, 김 사장! 니 이카면 내 입장이 뭐가 되겠노?"
"잘 압니더, 박회장님 저희 집 십 년 고객이라카는거, 오늘 지 실수로 저희 집, 발 끊는다캐도 후회 안 할랍니더. 용서하이소."
"거 참! 대단한 넉살이네."
"지가예, 시님 열렬한 팬입니더, 오늘 아이먼 시님께서 언제 또 오시겠십니꺼? 경우 아이라카는 거 지도 잘 압니더. 용서하이소."
"배짱이 내 배 째라는 수준이군!"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꼬집어 뜯어도 굼쩍도 하지 않았다.
스님께서도 쉽게 포기할 보살이 아님을 아셨는지 품속에서 늘 쓰시던 만년필을 꺼내셨다. 스님은 문짝만 한 화선지의 저어 왼쪽 맨 끝자락에 시선이 멈추셨다. 거기다가 원고지 필체로 당신의 법명 '법정法頂', 두 글자만 깨알 같은 글씨로 빠르게 쓰셨다. 그리고 화선지를 둘둘 말아 주인에게 정중히 주면서 한마디 하셨다.
"보살님! 현재 내가 공양을 못해 배가 텅 비어 공空합니다. 나머지 여백은 지금 텅 빈 내 마음이니 그냥 남겨두겠습니다. 됐소?"
주인은 무릅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있다가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자신이 들고 온 지필 묵으로 부처 불佛자나 크게 써주던지 하다못해 달마대사 고리 눈이라도 툭툭 쳐줄까 기대했다가 화장지 없는 화장실에 무방비로 들어간 표정이었다.
박장대소가 터졌다. 그때 건너편에 앉아 있던 서울 본부장 윤 청광 선배께서 한마디를 던져 사장을 줄행랑 치게 만들어버렸다.
"사장님 지금 뭐 하세요? 그마저도 스님께서 다시 회수해 버리기 전에 빨리 자리를 피하세요!"
